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9181939475&code=960205
ㆍ사십사
ㆍ백가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360쪽 | 1만3000원
40대, 몸은 시들고 정신은 절망에 추접스러워지는 때, 라고 단언할 순 없지만 삶이 그리 허물어지기 시작할 수도 있는 시절이다. 열등감과 폭력을 양분처럼 생산하는 한국 사회에서 생의 절반쯤을 보내며 쌓아올린 개인들의 역사 중 가장 외면하고 싶은 모습만 골라 그린 초상화를 상상해보자.
소설가 백가흠씨(41)의 단편집 <사십사> 속 이야기 9편에는 한때 인간다움을 놓고 자신을 포기한 대가를 자기모멸로 돌려받는 40대들이 등장한다. 교수나 작가로 나름 지위와 돈을 갖추고 살건, 일용직이나 백수건 상관없이 책 속 40대들은 근원을 잊고 싶은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그런 만큼 남을 괴롭힌다. 작은 모욕에 열을 내고 큰 모욕은 꿋꿋이 참는 기만의 틈새로는 너절하고 한편 애처로운 면모들이 삐져 나온다. 일종의 관용어처럼 쓰이는 ‘홍상수 영화’의 더 세고 불쾌한 버전 같은 이야기들이다.
<사십사>의 인물들은 잊으려 애썼던 과거를 자의나 타의로 마주하지만 그들은 끝내 비겁함을 떨치지도 제대로 속죄하지도 못한다. ‘기억보다 망각이 비대해진 나이’니 과거를 기억의 수면에서 지울 수는 있지만, 세월의 더께가 쌓여도 몸에 새겨진 폭력은 흩어지지 않는다. ‘한 박자 쉬고’에서 독신의 작가 재준은 학창 시절 자신을 똘마니로 부리던 균수를 21년 만에 우연히 조우한다. 균수의 아내와 아이들까지 단란한 가족과 함께한 내키지 않은 저녁 자리에서 재준은 잊었던 기억이 밀려 나온다. 재준은 고등학교 때 철저한 주종관계 속에서 개처럼 균수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비참하게 살았다. 균수의 데이트 비용을 마련하느라 재준은 실제로 몸이 부서지기도 했고, 균수에게 맞지 않기 위해 친구를 대신 갖다 바쳤다. 그리고 21년간의 ‘한 박자’를 쉬고 만난 균수는 아무 문제 없이 잘살고 있다. ‘미안하다, 홀가분하다’며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균수에게 재준은 21년 전 그때처럼 저항하지 못한다.
‘더 송 The Song’의 교수 장철문은 엘리베이터에 타면 화가 솟아 욕을 해대거나 코딱지를 파거나 가래를 뱉는 등 낯선 사람들에게 무례하다. 평생 바람을 피웠고 이를 묵인하던 아내는 20년 만에 갑자기 사라진 뒤 이혼소송을 걸었다. 대학원생을 성추행해 현재는 파면 위기에 처해 있다. 철문은 자신의 ‘분노나 화, 신경질, 피해의식, 강박증 같은 것들의 시초’를 30년 전에서 찾는다. 그는 지금 겪는 모든 문제의 근원을 대학 신입생 시절 반동거했던 여자친구의 룸메이트 미현과의 갈등, 그리고 자신이 미현이 데려온 개 장구를 내다버렸던 일에 돌리면서 이미 죽은 미현에게 분노를 퍼붓는다. ‘흉몽’에는 영문 모르게 입술이 잘려나간 출판사 편집장이 나온다. 언제나 후배와 힘없는 필자들을 무시했던 그는 능력은 있었지만, 입술이 사라지고 일할 수 없게 되면서 홀로 남겨진다. 자살에 실패한 그는 제 입술을 가져갔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 복수를 위한 목록을 만든다. 그러나 빽빽한 목록은 결국 자신에게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않았는데 그가 입술을 도려내고 싶은 사람으로 바뀐다.
화가 변웅필의 ‘한 사람으로서의 자화상’
여자들의 경우 친구는 있다. 표제작 ‘사십사’는 제목처럼 마흔넷 교수인 독신녀 제민의 생일날을 그렸다. 제민은 운동중독 덕에 마흔을 넘기고도 44 사이즈를 유지하고, 30대 중반에 정교수가 된 행운아다. 모두 불륜이었던 세 번의 연애, 커플투성이인 해외 휴양지에서 혼자 즐기는 모습, 부모님이 9년 전 제민 생일에 떠난 효도여행에서 사고로 사망한 것 등 삶의 편린이 하나의 풍경을 그린다. 제민은 첫 남자인 대학원 지도교수 윤종석을 생일날 우연히 마주치는데, 훤칠했던 남자는 머리가 빠지고 몸이 왜소해지고 등이 굽어 있었다. 결혼하자는 말에 싸늘했던 그가 이제 제민의 손을 꼭 붙잡고 저녁을 먹자고 조르지만, 제민은 그를 견디기 힘들 뿐이다. ‘네 친구’에는 몇 년 후의 제민과 친구 혜진, 은수까지 40대 여자친구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깎아내리고 생채기를 내는 데 열중한다.
작가 백씨가 실제 40대에 접어들었고, 그에게 익숙할 공간인 대학, 출판업계, 문학 창작교실 등이 소설의 주 배경으로 등장하기에 어떤 음습한 현실이 이야기의 씨앗인지 호기심이 드는 것도 <사십사> 읽기의 재미다.